[단독] "상하이 봉쇄는 상하이방 차단 작전"…시진핑 체제 완성한 리창의 모략

입력 2023-04-19 16:03   수정 2023-05-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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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봉쇄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장주(江朱)’ 봉쇄 작전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 공산당 관계자는 코로나 확산 방지를 이유로 작년 3월27일부터 5월31일까지 두 달에 걸쳐 이뤄진 상하이 봉쇄 조치는 상하이방 원로들의 막후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장주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주룽지 전 총리를 의미한다. 이들은 중국 최대 정치파벌인 ‘상하이방’의 양대 산맥이다.

상하이방 원로들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에 반대하고 리커창 전 총리를 중심으로 지도체제 개편을 추진하자, 상하이 봉쇄로 이들의 막후 영향력 행사를 원천 차단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상하이방 원로들을 무력화시킨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10월 ‘최고지도자는 10년만 부임한다’는 권력승계 원칙을 깨고 장기집권에 시동을 걸었다. 중국 최고 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서열 1~7위)도 상하이방·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출신) 등을 배제하고, 모두 시좌진(시진핑 측근 그룹)으로 채웠다.

상하이 봉쇄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에 옮긴 인물은 시진핑 집권 3기 서열 2위로 떠오른 리창 국무원 총리다. 장쩌민과 주룽지, 그리고 쩡칭홍 등 상하이방 원로의 입을 차단한 공로가 파격적 발탁승진의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한 중국 전문가는 “권력 승계 원칙을 깨고 시진핑의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상하이방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게 사실”이라며 “결과적으로 상하이 봉쇄가 상하이방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상하이 봉쇄는 어떻게 이뤄졌나
상하이 봉쇄는 3월27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상하이시는 당시 봉쇄 조치 전날까지 “상하이 봉쇄는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기습적으로 각 가정에 외출금지 스티커를 부착한 뒤 집 밖으로 이동을 일절 차단했다. 상하이의 중심인 황푸강을 기준으로 도시를 동서로 쪼개 봉쇄 조치에 돌입했다. 대중교통도 운행을 멈췄다. 코로나 확산 금지를 명분으로 2600만 인구가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일시에 감금된 것이다.



면적(6340.5㎢)만 한국 수도권의 2배에 달하는 상하이를 봉쇄할 수 있다고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갑작스러운 봉쇄 조치로 중국 최대의 경제 중심지는 아수라장이 됐다. 생필품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봉쇄 명령을 어기고 거리로 나섰다가 중국 공안에 폭행당했고, 지병이 있던 사람들은 병원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을 잃는 일도 발생했다. 유족들이 집안에 갇혀 울부짖는 모습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전파됐다. 국제도시 상하이의 이미지도 큰 타격을 입었다. 두 달 동안 이뤄진 봉쇄의 여파로 25만7000명의 외국인이 상하이를 떠났다.

경제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다. 상하이 봉쇄의 여파로 작년 2분기 중국 경제성장률은 0.4%로 주저앉았다. 지금도 중국 경제가 여전히 더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경제 중심지 상하이 봉쇄가 결정타가 됐다는 평가다. 세계 최대 무역국인 중국의 고립은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수입 감소는 각국의 수출 전선에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특히 상하이가 역사적으로 외부와 교류가 많고 개방적인 성향임을 감안할 때 정치적 민감성을 무릅쓰고 단행된 봉쇄 조치는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주룽지 비판 전한 WSJ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상하이 봉쇄 직전인 작년 3월 15일 “주룽지 총리를 중심으로 한 상하이방 공산당 원로들이 시진핑 3연임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친(親)시장주의자인 주룽지 전 총리가 시진핑의 공동부유론·감시통제 강화 조치 등으로 촉발된 중국경제 위기에 쓴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룽지 총리가 중국 경제정책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명문으로 막후 영향력 행사에 나섰다는 게 당시 WSJ의 보도였다. 리커창 당시 총리를 시진핑 주석을 대신 차기 국가주석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관측된다고 했다.



이 무렵 원자바오 전 총리도 시진핑 중국에 대한 비판 행렬에 가세했다. 그는 마카오 잡지 ‘오문도보’에 별세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 형태의 연재 기고문을 실으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고, 기만과 모욕, 압박에 반대한다”, “내 마음속의 중국은 마땅히 공정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라고 썼다. 이는 중국의 현 상황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 않다는 의미로 읽혔다. 원로의 은유적 비판에 중국 당국은 이 기고문의 공유와 배포를 금지했다.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결정될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를 앞두고 원로들의 비판 목소리는 부담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진핑 주석의 정치적 정적인 상하이방의 움직임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상하이방의 명분은 충분했다. 우선 시진핑 주석이 ‘공동부유론’을 내걸고 갑자기 몰아친 사정 바람은 중국 자본시장과 시장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다. 제로 코로나 정책도 서민들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WSJ는 작년 3월 기사에서 “2021년 연말 공산당 고위급 정치회의에서 시진핑의 ‘경제 캠페인’이 너무 나갔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현지 목소리를 전했다.

무엇보다 시진핑이 권력 승계 원칙을 깬 것이 상하이방 원로들의 불만이었다. 모택동 시대의 1인 지배체제와 장기 집권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등소평이 설계한 후계자 승계 원칙을 시진핑 주석이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등소평 전 부총리는 당대 최고 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미리 선택하는 ‘격대지정’과 최고지도자로 10년만 재임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 원칙에 따라 등소평은 장쩌민에 이은 차차기 지도자로 후진타오를, 장쩌민도 차차기 후계자로 시진핑 주석을 지정했다.

○시진핑과 상하이방의 싸움



격대지정 원칙에 따라 시진핑 주석이 장쩌민 주석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쩌민 전 주석은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 출신 인사들을 대거 발탁함으로써 태자당(혁명 원로 자제들 모임), 공청단과 함께 공산당 3대 계파 가운데 하나인 상하이방을 키웠다. 그가 2003년 후진타오 전 주석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은퇴한 뒤에도 상하이방은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쩌민 전 주석이 시진핑을 후계자로 지정한 것도 당시까지 당내 세력이 약했던 시진핑을 주석으로 앉힌 뒤 수렴청정을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집권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펼치면서 정적 제거에 나선 것이다. 반부패 작전의 타깃은 대부분 상하이방을 향했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장과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등 상하이방 핵심 인사들은 시진핑 집권과 동시에 숙청됐다. 인민해방군 서열 1, 2위인 궈보슝과 쉬차이허우도 낙마했다. 모두 장쩌민 전 주석의 최측근이었다.



상하이방의 힘을 조금씩 빼던 시진핑 주석은 상하이 봉쇄로 원로들의 목소리를 차단한 이후 작년 9월 상하이방 핵심인 푸정화 전 사법부장과 쑨리쥔 전 공안부 부부장까지 뇌물 수수 혐의로 적용해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작년 11월엔 상하이방의 마지막 버팀목이던 장쩌민 전 주석이 사망하면서 더 이상 시진핑 주석에 대항할 힘을 잃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상하이방 원로그룹의 주룽지 전 총리, 우방궈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뤄간 전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 등은 작년 10월 중앙위원회에 불참하면서 시진핑 주석에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상하이방 핵심인 쩡칭홍 전 부주석이 여전히 건재하지만 사실상 손발이 모두 잘리면서 향후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한계가 있을 것이란 평가다.

○2인자로 떠오른 리창, 무너진 쌍두체제
상하이 봉쇄를 주도한 리창은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로 있을 때 비서로 보좌했던 인물이다. 시진핑의 오랜 심복이지만, 단번에 서열 2위로 부상할 것으로 내다본 사람은 드물었다. 게다가 부총리 경력이 없는 상하이시 서기의 국무원 총리 직행은 이례가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리창의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졌던 상하이 봉쇄가 실제로는 리창이 총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2인자 선정의 권한은 여론이 아니라 시진핑 주석에게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대 총리는 저우언라이와 화궈펑을 제외하면 모두 부총리를 지냈다. 저우언라이는 모택동보다 한때 서열이 더 높았던 개국공신이라는 점에서, 화궈펑은 모택동의 공식 후계자라는 점에서 예외를 인정한다고 볼 때 리창의 발탁은 모두의 예상을 깬 것이다. 이를 두고 과거 1인자와 2인자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정권을 이끌었던 ‘쌍두체제’가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진핑 비서 출신인 리창에게 견제와 균형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점에서다. 한 전문가는 “상하이 봉쇄의 진실을 모두 알기에는 정보의 한계가 있다”며 “다만 리커창 추대 움직임 이후 진행된 상하이방 와해 과정은 단순히 상하이 봉쇄를 방역 조치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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